“선생님! 제게 남기실 가르침은 없으신지요?”
노자는 스승 상용(商容)이 늙고 병들어 세상을 뜨려하자 이렇게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이 입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내 입속을 봐라.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빨은 보이지 않느냐?” “예. 선생님!”
스승이 말했다. “알겠느냐?”
노자가 답했다. “딱딱하고 센 것은 없어지고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남는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러자 스승은 돌아누우며 말했다. “천하 일을 다 말했느니라.”
허균이 쓴 한정록에 나오는 얘기다.
상용이 입안을 보여주며 가르치고자 한 까닭은 무엇인가. 삶의 위대한 스승 노자의 대꾸가 그야말로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답이다.
천하와 도를 두루 헤아리고 통찰했던 노자 선생도 이처럼 몸을 낮췄다.
유약겸하(柔弱謙下) 즉, 부드러움과 겸허히 낮춤의 철학이다. 겸허히 몸을 낮춤에 대해 앞의 얘기에 더하자면 이렇다.
스승이 일렀다. “고향을 지날 때는 수레에서 내려야 한다. 알겠느냐?”
“예,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시지요?”
수레에서 내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나오는 겸손한 태도를 말한다. 스승이 고향을 지날 때 수레에서 내리라는 소리에 노자는 바로 그 말이 제 뿌리를 잊지 말라는 말로 알아차린다.
다시 스승이 말했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나갈 때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지요?”
종종걸음이란 어른이나 임금 앞을 지나갈 때 걷는 걸음걸이다.
상용이 노자에 한 가르침을 간추리자. 뿌리를 잊지 말고, 어른을 공경하고, 부드럽게 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상용은 직접 말하지 않고 에둘렀다. 그 은유를 노자는 곧장 알아차렸다. 그 슬기 깊은 경지를 누군들 따를 수 있을까.
어느 누가 천하의 노자가 몸을 낮추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인생과 역사의 큰 스승 노자는 그리했다. 그것은 바로 크게 살고자 함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 잘 났다고 악다구니 쓰고 뻔뻔함으로 인두겁을 두른 저 인숭무레기들이여. 말이야 바른 말로 너희 따위들에게 상용과 노자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제가 강한 줄 아는 모양이다. 허나 강함이 무엇인지 부드러움이 무엇인지조차 분간이 안 되는 이들이 그들이다.
혀와 이에 관한 비슷한 우언은 또 있다.
“혀는 남지만 이는 없어진다. 강한 것은 끝내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다. 문짝은 썩어도 지도리는 좀먹는 법이 없다. 편벽된 고집이 어찌 원융(圓融)함을 당하겠는가?”(舌存常見齒亡, 剛强終不勝柔弱; 戶朽未聞樞蠹, 偏執豈及乎圓融)
명나라 때 육소형(陸紹珩)의 책에 실려 있는 글이다.
호추불두(戶樞不蠹)라는 말이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는 좀먹지 않는다. 움직이기 때문이다 (流水不腐, 戶樞不蠹, 動也)”라고 했다.
문짝은 비바람에 쉽사리 썩는다. 하지만 문짝을 여닫는 축 역할을 하는 지도리는 오래될수록 매끌매끌 길이 난다. 나무로 만들었어도 좀먹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강한 것은 우선은 남을 부숴버리지만 결국은 제가 깨지고 만다. 부드러움이라야 오래 가고 끝끝내 자신을 보존한다. 어떤 강한 충격도 부드러운 완충에 접하면 스르르 힘이 사그라진다. 강한 것에 맞서 더 강한 것으로 막으려 한다면 결국 모두 다친다.
한비자에 보면 초명(鷦䳟)의 날개를 단 비둘기라는 우화가 나온다. 초명은 크고 강한 날개를 갖고 있는 전설적인 새다. 해설서에 “초명은 봉황과 비슷하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봐 봉황새 비슷한 남방의 신조(神鳥)로 풀이된다. 만약에 이 초명의 깃털을 뽑아 비둘기에 붙여준다고 하자. 비둘기는 그 깃털 때문에 무거워서 제대로 운신도 못할 게 뻔하다. 제대로 힘 좀 써보라고 좋은 날개를 붙여줘 봤댔자 도리어 버둥대다가 제풀에 쓰러져 죽는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기본소양이나 감당할 능력, 즉 올바른 기본이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사회 구석구석에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만 앉아 떵떵거린다. 자기 업무도 감당 못하는 주제에 여러 사람 위에 군림하려든다. 그런 이들에게 어찌 유약겸하(柔弱謙下)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혹여 오만방자라면 또 모를까. 이제 그러다보니 온통 허위와 교만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 외려 겸양과 예의를 다하는 자가 비웃음 받는 도치된 세태다.
중국 푸젠성에 첸삐정(陳必錚)이라는 우언 작가가 있다. 이 이의 ‘달의 고민’ 이라는 작품을 보자.
달이 비록 밝고 깨끗하지만 사람들을 전혀 따뜻하게 해줄 수 없었다. 더구나 이슬조차 말리지 못할 정도여서 자기 능력에 대해 고민하다가 해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해가 대답했다. “달아. 네가 스스로 이제껏 한 번도 열을 낸 적 없고, 늘 다른 사람의 빛을 빌려 쓰기 때문이야.”
줄거리는 간단하다. 달과 같이 자기 힘은 없어도 큰 실력자 행세를 하면서 으스대는 처지가 얼마나 많은가.
첸 작가는 사람 사는 사회의 차광(借光)현상〔남의 덕을 입음〕을 꼬집었다. 비유가 참으로 적확하다. 달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게다.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이다. 허나 어쩌면 그리 딱 들어맞는가. 인간사회가 모두 그러려니 하면 그만이겠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우리나라 세태를 보면 그 도가 지나치다, 그냥 넘기기에는 참으로 꼴사납고 나라의 기강도 문란하기 그지없다.
권력 최상위권자부터 왜 그리도 냉혈한 같은 언사에다 자기만 절대선인 양 국민의 고통에 대해 오불관언인가. 민생이 도탄에 빠지건 말건 자신에게 주어진 국정 통수권자의 위상은 잊기로 한 듯하다. 그저 아직도 일개 정당의 우두머리 정도로 자족하려 작정한 듯싶다. 헌법이 부여한 국가통치의 크나큰 권능과 위상은 외면한 채 아첨배 집단의 아부와 사탕발림에 마냥 도취돼 홍야홍야 중이다. 오로지 일개 정략집단의 보스 역할로 대만족이고 장취불성할 태세다. 주변 측근의 호가호위는 또 얼마나 가관인가. 그렇기에 꼭 짚어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지금과 같은 혼란한 시기에는 세계 최초의 리더십 이론가로 꼽히는 4000여년 전의 인걸 고요(皐陶)가 새삼스레 그리워진다.
순(舜)임금이 치수사업을 성공시킨 우(禹)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자리에서 리더십과 팔로어십(followership)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서슴지 않았던 고요였다. 순임금이 신하의 팔로어십을 전제로 한 리더십을 거론하자 고요는 뼈 있는 말로 대꾸했다. “진실한 리더십 없이는 팔로어십도 없다”
그러면서 그는 법도(法度)를 준수하고 현명한 판단력으로 비전과 이상을 제시해야 바람직한 리더라고 주문했다. 바로 오늘날 리더십 이론에 견줘 봐도 손색 없을 정도로 깔끔하다.
고요는 요·순 시대 인물로 순임금 때 형정(刑政)을 주관하는 사(士, 사법부의 수장과 같은 자리)에 임명됐으며, 순을 계승한 우를 보좌하면서 큰 치적을 남겼다. 우는 고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고요가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고요의 리더십을 보자. 고요는 리더가 갖춰야 할 자질로 ‘구덕(九德)’론을 제시한다. 구덕은 리더의 자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리더십을 정의할 정도로 논리가 정교하다. 먼저 구덕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숫자 ‘9’는 동양 사회에서 더 이상 갈 데 없는 ‘극수(極數)’로, 완벽한 수를 뜻한다.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천자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고대의 천자들이 아홉 개의 큰 세발솥, 즉 ‘구정(九鼎)’을 주조해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인들은 장차 21세기는 도덕적 가치가 높이 평가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들 입을 모은다. 이런 점에서 고요의 9덕은 밤하늘의 1등성처럼 찬연히 빛날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것이 분명하다. 새삼스럽게 뜻을 새겨보는 이유다.
첫째, 관이율(寬而栗 너그럽고 의젓함)이다. 둘째. 유이립(柔而笠 부드럽고 굳건함)이다. 셋째. 원이공(愿而恭 정성스럽고 공손함)이다.
넷째, 난이경(亂而敬 다스리는 힘이 있고도 조심성이 있음)이다. 다섯째, 요이의(擾而毅 순하면서도 과감함)이다. 여섯째, 직이온(直而溫 꿋꿋하면서도 따뜻함)이다.
일곱째, 간이염(簡而廉 간소하면서도 조촐함)이다. 여덟째, 강이새(剛而塞 강건하면서도 독실함)이다. 아홉째, 강이의(彊而義 굳세면서도 의로움)이다.
구덕(九德) 가운데 삼덕(三德)을 지키고 행하는 자는 혈족의 족장의 자격이 있다. 육덕(六德)을 지키고 행하면 제후로서 한나라를 다스리는데 부족함이 없으며, 구덕(九德)을 실천하는 사람은 천하를 통치할 수 있는 제왕이 될 수 있다.
고전적인 해석이지만 오늘의 뜻에 맞춰 풀이해도 얼마든지 시대정신에 적절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리더십으로 본연의 가치가 빛난다.
구덕은 공자가 편찬한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 서경은 중국의 요순시대에서부터 춘추전국시대 전까지 약 1500년 동안에 있었던 훌륭한 군주와 신하의 언행을 간추린 내용으로 백성을 섬기려면 구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가치에 비춰본다면 국민을 위한 최고통치자가 갖춰야할 필수 덕목이다. 우리는 이 아홉가지 중에 몇 가지나 간직한 지도자를 바라보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얄궂고 스산하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