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 남매탑을 찾았습니다.

오래 전 대학을 함께 다녔던 친구들이 공주 동학사에서 만났습니다. 동학사는 행정구역은 공주이지만 실제로는 대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계룡산이 가로막혀 있어서, 갑사는 공주이고 동학사는 대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학사 주차장에서 친구들을 아침 10시 40분에 만났습니다. 주차장은 동학사에서 운영한다는데, 선불로, 승용차 1대당 이용료 4천원씩을 받았습니다. 산행 목적지를 남매탑으로 잡았습니다. 동학사 뒷편으로 오르면 경사가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길을 물어봤더니, 주차장에서 가까운 곳에 완만한 등산로 입구가 있었습니다.

남매탑까지 오르는 길이 완만하고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날 비가 와서 풍광이 깨끗했습니다.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나뭇잎들이 역광을 받아서 투명하게 빛났습니다.배재는 산등성이 고개마루입니다. 남매탑은 배재에서 얼마되지 않습니다. 남매탑에는 1973년 2월에 가봤던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곳은  옛 절터로서 터가 꽤 넓었습니다. 남매처럼 탑이 나란하게 둘이 있습니다. 탑이 날씬한 것을 보니 고려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탑 하나는 비교적 온전한데 나머지 하나는 조잡하게 맞춰놯습니다.

그곳에 계신 스님 말씀을 들으니  1940년(?)대에 서툰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탑은 부서져 산 기슭 이곳저곳에  흩어졌는데 어느 불심이 깊은 분이 사비로 들여서 그런대로 맞춰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공덕비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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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탑에 대한 설명문이 있었습니다. 스님 말씀이 교과서에 나온다고 했습니다. 어느 교과서일까요, 스토리가 제법 재미있었습니다.

남매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가끔 찾아와 보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던 충남대학교 수학과 강명경 교수님은 저희 공주사범대학교 은사님이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산을 좋아하셔서, 산행일기를 쓰셨는데, 1천번도 훨씬 넘게 계룡산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남매탑 아래 상원암이 있었습니다. 앞 뜰에 등산객들이 쉴 수 있도록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들도 확 트인 전망을 보면서준비해온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동학사는 근세 한국불교의 선풍을 이르킨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 – 1912) 스님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1945 – 2013)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불교에 대한 소설 ‘길 없는 길’도 썼고, 한국 유교에 대한 ‘유림’도 썼습니다. ‘별들의 고향’, ‘상도’도 유명했습니다. 그가 쓴 ‘길 없는 길’에는 많은 불교 일화들이 나옵니다. 작가는, 제 기억으로, ‘눈물샘 암’으로 힘들면서도 별도의 방을 얻어서, 공부하면서, 소설들을 썼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경허 스님의 행적을 짧게 뒤돌아 봤습니다.

경허 스님은 전주 자동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본명은 송동욱이랍니다. 가세가 어려워 어머님께서  6살짜리 어린 아이를 과천 청계사로 데려가 그곳에 계신 계허(桂虛)스님 밑에서 5년 동안을 보냈답니다. 계허스님이 환속을 하게 되어 학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 당시 동학사에 계셨던 금강산 스님  만화보선(萬化普善) 스님께 보내졌답니다. 계허스님의 법형 태허(泰虛)스님이 공주 마곡사에 계셨는데 만화스님도 마곡사에 계시다가 동학사로 옮겨와 크게 중창하신 분이셨습니다.  경허 스님은 동학사에서 11살부터 9년간 만화스님께 불경을 배우고, 19살때부터  동학사강원에서 12년 넘게 강사를 했답니다. 1879년, 스님이 31살 되던해, 갑자기 옛 은사인 환속하신 계허스님 생각이 나서 길을 나섰답니다.  스님이 천안 근처를 지나는데,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어서, 곳곳에 시체가 뒹굴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답니다. 스님은 그런 죽음의 공포 앞에, 그 동안 자신의 공부가 얼마나 미흡한 것인가를 깨닫고 그 길로 동학사에 되돌아와서 강원을 폐쇄하고 두문불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동학사 조실에서 3개월 동안 면벽 참선하시다시 드디어 깨달음을 얻으셨답니다. 1880년 32살 때입니다. 그 뒤 서산 천장암에 보임하시고, 충청도 일원에서 50세 될 때까지, 17여년 선풍을 떨치셨습니다. 1899년 51세에 해인사 조실이 됩니다. 1904년 56세에 만공스님께 전법계를 수여하시고, 1906년 58세 되던 해 안변 석왕사 나한 개금불사를 마친 후 종적을 감추십니다. 그 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스님은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라고 하며 함경도 일대에서 서당 훈장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6년 가량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지내다가 1912년 64세에 함경북도 갑산에서 임종계를 남기고 입적을 하십니다. 그 즈음 속가 제자로서 김탁이라는 분이 있는데, 상해임시 정부 등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한 분이라고 합니다. 이듬해 1913년 소식을 들은 제자 만공과 혜월이 갑산에 찾아갔답니다. 경허스님의 유골을 제자들이다비해 드리고 갑산 난덕산에 묻었다고 합니다.

낯선 곳에서 떠돌다가 쓸쓸히 입적하신 스님의 적적했던심경이 어떠했을까요. 1912년, 그러니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망했을 때였지요.

이 가을, 그 어느 옛적이었던가,  경허 스님의 그 쓸쓸했음에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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