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가 들어 있지 않은 세계지도는 바라볼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지도는 인류가 언제나 발을 딛고 있는 하나의 나라를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 한 것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 – 1900)입니다. 그 탐미적인 예술지상주의자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인류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살아가면서 유토피아를 꿈꿔보지 않은 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류는 맹수와 자연재해,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인한 공포와 고통이 없는 세상을 얼마나 꿈꿔 왔겠습니까. 아주 작은 집단으로부터 부족을 이루고, 오늘날과 같은 국가라는 체재가 갖추어진 상황까지 유토피아에 대한 인류의 염원은 면면하게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저 산 아래 초가삼간”일 수도 있겠고, 어느 외떨어진 “머나먼 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토피아란 시대마다, 또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영국의 토머스 모어(1478 – 1535)가 처음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 (nowhere)이라는 의미랍니다. ‘이상향’이란 개념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리스시대 플라톤(BC 427 – BC 347)이 쓴 ‘국가’(Politeia)는 토머스 모어에서부터 웰스 (E. G. Wells, 1866 – 1946)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모델이 됐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발전함에 따라, ‘Utopia'(없는 곳 : Nowhere)는 ’Eutopia'(좋은 곳 : the place where things are well)의 의미로 강화되었고, ‘현실 유토피아’의 문제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사회적 현존질서(topia)를 변형시킬 만한 작용을 갖는 ‘존재를 초월한 표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실현되지 않은 현재 상태‘(the Not-Yet-Conscious)를 유토피아라고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유토피아는 종교와 문학에서 각각 수도 없이 많이 추구했고 실제로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토머스 모어처럼, 대개 비웃는 풍자로 다뤘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을 제공하기보다 대부분, 단지 실현 불가능한, ‘웃음거리’로 묘사한 것입니다. 종교집단은 달랐습니다. 미국에서의 예를 들면, 1663년부터 1858년까지, 약200년 동안에 무려 138개의 종교적 공동체 집단들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대부분은 설립자가 죽고 난 뒤 소멸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주의적 종교공동체 건설은 20세기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종교공동체는 거의 모든 경우 신봉자들이 예언의 능력과 지혜를 가졌다고 받드는 단지 1명의 강력한 인물에 의해 건설되고 유지됩니다. 또 그러한 공동체의 대부분은 원래의 지도자가 살아있을 때 번창했다가, 지도자가 죽고 나면 대개 점점 쇠퇴해버리고 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좋은 세상이란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지난겨울 내내 그렇게 촛불을 밝히면서 우리들이 가졌던 염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되었고 새 대통령이 곧 선출 됩니다. 어떤 분이 대통령으로 뽑히든, 지금의 정치상황에서는, 여야 합의가 제대로 될 것 같지도 않고, 많은 어려움과 혼란이 예상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들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추구하는 이상이 무엇이냐가 이 혼란스러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이 너무 거창해서 그렇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들이 사는 바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들이 왜 없겠습니까. 이곳에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들뿐만 아니라 전 인류적 염원이고, 전 세계사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생활에만 너무 열중하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처해 있는 현실에 적응하다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생활방식을 바꿀 기회를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누구는 ‘항상 깨어있으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염원하는 유토피아는 그렇게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깨어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가운데 있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를 기권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좋은 세상이란 절대로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집을 생각해 봅시다. 벽지가 낡으면 각자 취향에 맞는 무늬와 색깔을 골라서 도배를 해야 않습니까. 선택 자체를 남에게 맡기고 어떻게 벽지 색깔이 내 맘에 들고 안 들고 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본인이 선택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우리들을 대신할 정치가들을 뽑은 선거입니다.
우리들에게 “이상향이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완주 대둔산에 다녀왔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중턱까지 올라가면서 경치를 보고, “신선들이 살고 있는 선경이 바로 저기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창밖의 경치를, 아쉬운 대로, 스마트 폰으로 몇 장 찍었습니다. 암반으로 된 봉우리 곳곳에 소나무가 점점이 박혀있는 모습이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였습니다. 산 중턱에 잡목이 연두색으로 새 잎을 피운 모습은 수채화 명품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진으로 크게 뽑아서 거실에 걸었습니다. 사진 양쪽에는 오래 전부터 “애람춘산여독화(愛覽春山如讀畵)/정연고묵사청금(靜硏古墨似聽琴)”라는 대련이 걸려있었습니다. 새삼 “유토피아는 참 가까운 곳에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정자들이 “정치를 조금만 잘해 준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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