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담원 정 인 보 선생

우리에게 국학자로 알려진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1893-1950)선생은, 본가는 회현동였지만, 태어나기는 북단재의 외갓집, 지금의 명동성당 근처, 이었습니다. 담원 집안은, 소위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각각 호조참판을 지냈습니다. 조선조 17대왕 밑에서 16명의 상신(相臣)을 낸 명문거족이었지만, 소론(少論)으로, 당파싸움에 밀려 담원이 태어날 즈음에는 몰락한 양반가의 전형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50세에 별세한 데 이어, 아버지의 형제 세 분 가운데 위 두 분이,전염병으로, 잇달아 돌아가셨습니다. 당시로는 당연하게 담원은 큰아버님 댁에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양모님도 명문집안 출신으로 훌륭하셨지만, 생모님도 完營日錄(완영일록)’을 쓴 전라도 관찰사 서유구(1764-1845)의 친손녀로 역시 대단한 분이셨답니다. 그 유명한 자모사(慈母思)’ 40수는 두 어머님을 그리며 쓴 시조입니다.

담원에게는 선생님들이 참 많았습니다. 담원은 집안의 여러 어른들 뿐만 아니라 그 어른들의 친구 되는 분들까지 모두 선생님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정인보는 11세 때인 1904년 서울을 떠나 진천 등으로 옮겨 다녔는데, 그 해에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고, 강제로 일 의정서가 체결 되었던,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담원이 시골로 옮긴 것은 혼란스러운 그런 시국 때문이었는지, 어떤 다른 가정사정 있었는지는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담원은 2년 후 1906년 서울로 돌아와서 대대로 가깝게 지내던 집안의 동갑내기 규수 성규숙과 결혼을 했습니다. 평생 스승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 1861-1939)을 만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뒷날 스승은 ‘13세에 처음 나를 보러 왔는데, 문장재기가 능숙하며 그 탁월함은 노성(老成)으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총명했었다.’라고 했었답니다.

소론(少論) 유학자들이 기울었던 양명학(陽明學)이란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학설입니다. 주자(朱子)格物窮理(격물궁리)’를 추구하는 주지주의적인 이학(理學)과 대립하는 간명직절(簡明直截)’한 심학을 중요시하고 지행합일을 주장합니다. 노론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습니다. 영조가 노론들의 도움으로 임금에 오르자 소론에 속했던 정제두(鄭齊斗 1649-1736)170961세 나이로 서울을 떠나 강화도 하일리로 옮겨 터를 잡았습니다. 조선유학사의 한 맥인 양명학의 강화학파가 그렇게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치열한 당파싸움 속에 학문적인 교류도, 서로 혼인을 통해서 맺어진, 집안들 끼리 이뤄졌습니다. ‘黨議通略(당의통략)’을 쓴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친동생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 1858 -1924)이나 그와 6촌인 난곡은 담원을 일평생 특별히 총애했었다고 합니다.

담원은 190816세 때 중국 상해에 가서 2년여 체류를 했고, 이 때를 시작으로 전후 다섯 차례를 왕래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생모님을 모시고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와 함께 중국을 다녀온 적도 있었습니다. 이 즈음은 집안끼리 세교가 있었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선생이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때 어떤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42년 벽초의 두 째 아들과 담원의 둘째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여 담원과 벽초는 사돈을 맺습니다. 두 집에는 딸들이 많았는데, 담원은 벽초의 딸들을 위해 가끔 시조를 지어주었답니다. “벗님의 귀한 딸이 내 딸에겐 시뉘라네/게다가 한 동네로 봄이 벌써 다섯 번이/내 글씨 굳이 달라니 정이신 줄 아노라// 내 딸을 언니라니 내가 아니 아제빈가/내 사위동생이니 사돈 어찌 척분이리/두 집이 두 집 아니니 따져 무삼 하리오.//‘’

담원이 1912(20)에 상하이서 애국지사들과 함께 설립한 동제사(同濟社)’, 곁으로 한인 간의 친목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이 지역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운동단체의 효시였습니다. 그 이듬해 담원은 국내에 남아 있던 부인이 쌍둥이 딸을 낳다가 죽고 쌍둥이 가운데 하나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했습니다. 그 후 담원은 재혼하여 43녀를 더 낳아, 모두 44녀를 두었는데, 벽초의 며느리인 2녀는 이북에 있고 3남은 6 25때 전사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담원은 양명학연원, 학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신문이나 저술을 통해서, 그 누구 보다도 민족정신 고취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대충 몇 가지를 꼽아보더라도, ‘이충무공 유적 보존사업이나 안재홍과 함께 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편찬, ‘조선사연구, 방대한 규모의 비문과 각 종 평론, 주옥같은 한글로 쓴 시조와 글들을 남겼습니다.

1983담원 정인보 전집’ 6, 2006년 담원의 담원문록 역주본상 중 하 3, 2016위당 정인보 평전’, 2018한글로 쓴 사랑, 정인보와 어머니등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담원(薝園)’臥薪嘗膽(와신상담)’에서 따 왔다고 했습니다. 쓸개 ()’의 고기 ()’ 변을 없애고, ()’에서 풀 초()를 가져와 치자 꽃’ ‘()’을 만들었답니다. 담원이 새집을 지었을 때, 벽초가 위락당(爲樂堂)’이라는 당호를 선사하더랍니다. 누가 그거, 벽초가 자네더러 당나귀라고 놀린 거야!”하니, 담원이, “그래? 그러면 ()’자만 빼고 위당(爲堂)’이라면 되겠네!”하더랍니다. 4대 국경일 가사는 모두 담원이 썼습니다. 곧 광복절입니다. 기억 나십니까?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히 보시려던 어른님벗님 어찌하리./ 이날은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자취니/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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