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술을 마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어지간한 술꾼은 평생 듣게 되는 질문입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해봐도, 묻는 사람의 속을 시원하게 할, 딱히 뾰쪽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집에서 찹쌀로 담가 용수를 박아 떠낸 술은, 확실히 향긋한 냄새가 있고, 입에 찰싹 붙습니다. 우리가 소위 ‘호랑이 눈깔 술’이라고 부르는 토속주 말고도, 좋은 포도주도 그렇게 향기롭고 감칠맛이 있을 것입니다. 술맛 자체가 좋은 술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도 가양주는, 결혼식이나 집들이 등, 집에 큰 경사가 있을 때나 담갔습니다. 지금부터 아무리 가깝게 잡아도 30년 전쯤의 얘깁니다. 언감생심, 좋은 포도주는 마음조차 내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마셔본 기억으로는 ‘마주앙모젤’ 정도가 최고였지 싶습니다. 술꾼이 술맛 자체가 좋아서 마시는 경우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는 분위기에 휩쓸릴 때가 더 많습니다.
양조는 넓게 보면 곡물이나 과일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합니다. 곡물이나 과일로 빚은 술을 증류하면 알콜 도수가 높아지고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아랍사람들이 발명했다는데, 원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답니다. 중국에는 수수(高粱)로 빚은 술이 많습니다. 하천이 자주 범람하여 수수를 많이 심기 때문이랍니다. 옛날 저의 고향인 만경강 강변 춘포에서도 그랬습니다. 만경강 양쪽 뚝방 사이를 ‘강속’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대아리 (구)댐이 있었는데 홍수가 자주 났습니다. 그 당시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산에 나무가 없었고 지금은 산에 나무가 울창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홍수가 나면 수수를 빼고 다른 작물은 휩쓸려 갔습니다. 워낙 가문 해에는 ‘강속’에 호밀을 심었는데, 추석 무렵 홍수에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곡식이 귀했던 그 시절에는 곡식으로 술을 빚는 것을 막았습니다.
금주령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답니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바뀔 때마다 금주령을 내렸답니다.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금주령을 내리자, 상투적인 퍼포먼스 정도로 알고,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가운데 병마절도사 윤구연이 술을 빚었다는 제보가 접수되자, 2주만에, 숭례문 앞에서 윤구연을 참수했고, 영조는 거기까지 가서 구경했었답니다. 모두 곡물이 부족한 시절의 얘깁니다. 서양에서는 포도주와 맥주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했었던 모양입니다. 금주령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은 다른 상태입니다. 가톨릭은 술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것에 비해 개신교에서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상황은 지금과 달랐답니다.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은 포도주를 즐긴 애주가랍니다. 루터의 부인 ‘카테리나 폰 보라’는 양조장까지 운영했었답니다.
우리나라는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오면서 ‘술자리에서의 사고’가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벌써 몇 년 전이던가,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50분, 그 당시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등, 6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습니다. 박정희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난장판 술자리는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습니다. 1986년의 ‘국회국방회회식난투사건’도 바로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회식에 참석했던 남재희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분위기가 험악하여 술잔을 던졌고, 장성이 이단옆차기로 찼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생각할 때마다, ‘군사문화’란 그런 것인가, 씁쓸합니다. 어쭙잖게 그러한 흉내를 일반공무원이 냈다가는 모가지가 열 개라도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공직자라면 술자리를 가려야 하고, 모름지기 자세를 똑바로 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권성동 국민의 힘 의원에 대해, 당 연찬회에서 금주령이 내렸는데도 술자리를 가졌다고, 국민의 힘 중앙윤리위원회가 징계 절차를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 국민의 힘 당윤리위원회가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를 징계해서 지금까지 집권 여당의 내분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있는데, 이제는 그 다른 쪽 당사자라고 볼 수 있는 권성동 의원까지 징계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자못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리위원회가 언제 그렇게 막강했었던가, 도대체 윤리 위원장이 누구길레 겁도 없이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양희(1956- )윤리위원장은, 비록 서울에서 낳았지만, 우리 고장 전주의 전설적 정치가였던 소석 이철승(1922-2016)의 직계 따님이었습니다. 어떻든 군사독재문화의 잔재라고 볼 수도 있는, ‘금주령 아래서의 술자리’에 대한 징계는 신선하게 느꼈습니다.
술은 폐해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저 자신을 포함해서, 단지 술로 인하여 집안이 시끄럽고 자신의 건강조차 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술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불행한 일이 어디 한둘뿐 입니까? 서양에서는 홍차가 술 대신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술이나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제 주변에서 보면, 술과 담배는 건강에 이상이 올 때까지 끊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여섯 번에 걸쳐 국회의원을 하신 운재 윤재술(1904-1986) 선생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금연기(禁煙記)’가 떠오릅니다. 국회부의장 시절도 양담배를 전혀 거리낌 없이 피웠답니다. 박 대통령 앞에서도 피웠고, 수술하고 아팠을 때도 안 끊었답니다. 아들의 한 마디, ‘아버님, 담배 끊으십시오.’ ‘제 놈이 무어라고, 담배를 끊으라고 해!’하며 딱 끊으셨답니다.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시지요?
을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