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청년문화, 어디에 있습니까

 

     

     <칼럼> 청년문화, 어디에 있습니까.

 

봄이 왔습니다. 거실에 둔 히야신스 꽃향기가 코를 마비시킬 만큼 강합니다. 뜰에는 수선화 순도 올라왔고, 서향 봉오리가 터지려 합니다. 벌써부터 일기예보에서는 꽃 소식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꽃들은 차례대로 다투어 필 것이고 신록은 눈부실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계절에 따라 바뀌는 주변 경치를 둘러보는 것이 삶의 재미가 되었습니다. 모란이 지면 장미의 계절인데, 모란이 지고나면 장미가 필 때까지 한참이 허전했습니다. 작년에는 새삼스레 작약을 몇 뿌리 구해 심었습니다. 모란이 진 뒤 바로 작약이 핀다면, 필름을 바꿔 끼우는 시간도 없이 계속 영화를 보듯, 연이어 황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각자 직업이 있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일상에서 느끼는 재미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공통적으로 자녀들의 문제가 관심사일 수밖에 없고 언제나 마음이 쓰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들도 덩달아 아픕니다. 어느 거사가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라고 했다지만, 세상에 부처가 따로 없습니다. 어떤 부처가 부모가 자식 염려하듯 중생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삶은 비슷합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 편안하고 건강하게 자기 길을 똑 바로 잘 가기를 바라는 것’ 아닙니까. 자기 자식이 애틋하다면 남의 자식도 어여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이들이 예사롭게 보이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환경을 뒤돌아봅시다. 사람 구실은 하며 제대로 살 수 있는 분위기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무언가 열심히 노력할 만큼, 그것이 곧 우리들의 보람으로 느껴질 만큼, 공평하고 정의롭다고 생각되십니까. 미래를 위해서는 그 시대 청년들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염려하듯이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꿈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청년들의 문화가 어떠한지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문화는 그 시대의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청년문화는 청년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문화를 어떻게 여기십니까. 청년문화가 살아있다고는 보십니까. 아니면,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양이나 서양이나 불문하고, 산업화 과정에 있어서는 아동도 소년도 청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린 유아와 노동자만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너 댓 살 만 되면 나름대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악명 높은 ‘궁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계 각국은 탈 산업사회에 접어들어 교육기간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은 현재 고등학교 졸업생의 약 80% 쯤 됩니다.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병역과 대학원까지 마치면 30세 가까이 됩니다. 젊은이들의 사회진출이 늦어졌고, 사회적응을 뒤늦게 치러야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청년문화의 ‘청년’이라는 접두어는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온 몸으로 느껴서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진화의 과정이 담겨있는 것이 청년문화의 본질입니다. 세대들끼리의 불화는 문화에도 있을 수 있고, 기성세대가 그것을 어떻게 포용하고 수용하느냐가 각 시대의 과제입니다. 문화란 무엇인가는 시각에 따라 다릅니다. 유럽적인 시각은 기독교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예술이나 문학처럼 ‘고상한 인간정신’을 척도로 하고, 미국쪽은 다양성을 인정하여 단순히 ‘생활양식’을 문화라고 본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미래는 청년들이 무엇을 생각하느냐, 청년문화가 어떠한가에 달려있습니다. 청년문화는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과 함께 어떤 창의적인 대안을 담고 있습니다. 70년대-80년대 민주화과정에서 그 시대의 청년문화는, 시대정신을 담는 그릇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했습니다. 대학축제에는 농악과 탈춤이 등장했고, 그 당시 권위주의에 대하여 온 몸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지만,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주장했던,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과 대안으로서의 ‘청년문화’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청년문화가 약화된 원인은 많습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자율성은 점점 확대되어야 합니다만, 고등학교까지 극도로 축소되었다가 대학에서는 대책 없이 ‘방임’에 가깝도록 풀어지는 것이 큰 원인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불초(不肖) 소생…”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세대에 살았습니다. ‘초(肖)’는 ‘초상화(肖像畵)’할 때의 ‘초(肖)’입니다. 닮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닮지 못한 것을 언제나 부끄러워하며 살고 있는 세대입니다.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성현을 닮지 못했고, 부모님을 닮지를 못한 것이 불효이고 죄였습니다. 그 가운데 청년문화가 어디에 설 자리가 있었겠습니까. 청년문화가 없는 문화는 정체된 문화입니다. 정체된 문화로는 발전 된 미래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기성문화가 정체되어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도, 창의적인 대안으로서의 젊은이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청년문화가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청년들의 기는 팍 살려주어야 합니다. 축제는 청년들의 잔치여야 합니다. 초 중등학교, 대학교 축제, 지방 자치단체에서 팍팍 밀어주어야 합니다. 문화도 산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미래에 투자해야 합니다. 축제라면, 이제 어른들은 무대 아래로 내려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객석에서 우리 청년들과 청년문화를 위하여, 박수를 치고 구경이나 하십시오. 앞으로 나오십시오. 청년문화, 어디에 있습니까.

                                                                            장택상/군산대학교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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