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국향(菊香),묵향(墨香),인향(人香)

이즈음 우리 고을엔 묵향(墨香)이 은은하다.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붓들이 줄달음친 먹의 향기가 전람회장마다 자욱하다. 지금 여덟 번째 열리는 세계서예 전시회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바로 전주비엔날레다.

이 축제엔 수많은 서예가들이 피땀으로 써낸 유운경룡(游雲驚龍)의 작품들을 선뵈고 있다. 그 어느 작품 하나라도 작가의 혼과 기가 녹아 있지 않은 것은 없다.

이런 가운데서 “오십년 동안을 못(먹물)에 빠져 있어도 한 획도 못 긋는다(五旬臨池 不識一字)”며 자탄하는 서예가도 있다. 서예가 선주선(宣柱善)이 서론(書論)을 담은 자신의 책에 붙인 제호에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붓을 수천 번 긋고 휘둘렀을 작품들이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필시 그 탄식은 결코 오만하지 않고 겸양한 넋두리일시 분명하다. 뭐라 해도 사람의 향기는 말릴 길이 없다.

그처럼 어렵고 외로운 길이 서예, 아니 서도의 길이지 싶다. 때문에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금시벽해(金翅劈海) 향상도하(香象渡河)’를 필법으로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금시조 날개가 바닷물의 거스름을 이겨 둘로 가르고, 향기로운 코끼리가 육중한 발바닥을 강바닥에 딱 붙인채 건넌다.’ 이처럼 굳건하고도 억센 ‘거스름’도 필법의 특색 가운데 하나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필법이라 해서 굳건하고 억센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게다. 때론 가냘프고도 여린 획도 있어야 조화를 이룰 것은 당연한 이치일 터다.

세상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세상엔 분명 이것과 저것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게 있다. 선과 악, 희망과 절망, 행복과 불행, 용기와 굴복, 정의와 불의 따위다. 이를 분간 못하는 이는 없다. 그처럼 분명히 나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리석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이 매사를 모두 탈 없이 추스려주진 못한다. 그것이 세상사다.

확실히 다르고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사물을 흑이거니 백이거니 구별하는 것은 딱부러진 논리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이분법적인 논리가 세상만사를 다 여의케 하지는 않는다. 바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너무도 유명한 뫼비우스 띠를 보라. 뫼비우스 띠는 앞뒷면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쪽 면을 선택해 줄곧 나아가다 보면 결국 우리가 뒷면이라고 생각했던 곳과 연결된다.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인가. 어느 쪽이 안이고 어느 쪽이 밖인가.

사람이 보이는 것이란 다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두 눈 다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은 너무도 분명히 달라 보이지만 그렇게 구별하는 순간 사람은 편견과 아집에 빠지기 십상이다.

향산거사 백거이가 ‘학(鶴)’이란 시에서 짚었던가.

사람마다 각자 좋아하는 바가 있고, 사물에는 본디 항상 옳은 것은 없거늘. 누가 그대더러 춤을 잘 춘다고 하던가. 내 생각엔 한가히 서 있을 때가 훨씬 나은걸. (人有各好所 物固無常宜 誰爾謂能舞 不如閑立時)’

어떤 이는 비상하는 학의 날갯짓을 보면서 감탄할 터이다. ‘허허! 그 학 참 춤 한번 너울너울 잘 춘다’며 넋을 놓을 게다. 해서 학은 춤을 출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리라. 하지만 반드시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물끄러미 먼 곳을 바라보며 그저 한가롭게 서 있는 학의 모습을 탄상하는 이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이는 고요히 머물러 있는 학의 고아하고 맑은 자태를 더 친다. 그래서 ‘음! 학은 역시 저 모습이야’라고 여길 게 분명하다. 이렇듯 같은 학이라 해서 모두가 그만그만한 모습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것이 여느 사람들의 심사요 눈길이다. 어찌 학을 바라보는 것만 그러하랴. 세상사 모든 일을 보는 눈들도 저마다 제각각이게 마련이다.

요즘 주변을 보면 자기 춤에 스스로 취해 날마다 신나게 춤추며 사는 사람이 많다. 그런 그를 보며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 사람은 춤출 때보다 가만히 있을 때가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춤을 춰야 할 때 우두커니 서 있는 것도 어색한 일이지만 가만히 있어야 할 때 날뛰거나 춤추는 것은 더욱 꼴불견이다. 자기 춤이 때로 멋들어진 경우도 있다. 허나 착각이거나 망령에서 벌인 춤이란 끔직하다 못해 추하다. 춤을 추지 말아야 할 때는 끝내 춤을 추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몸을 근질거리게 하는 음악이 자극한다 해도.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파문만 해도 그렇다. 4년전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말에 사저를 “아방궁” 이라 몰아붙였던 보수신문들은 아무런 내색을 않는다. 눈에 콩깎지가 씌면 곰보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격이다. 트위터 등 SNS에서는 이번 사저 파문을 “아방궁”에 빗대 “내곡궁”이라며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이에앞서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를 둘러싸고 벌어진 촌극은 가관이다. 실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나후보가 상도동을 찾아가자 “인상이 좋고 누가 봐도 멋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므로 크게 점수를 따고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발언을 그저 덕담으로 여기기엔 왠지 낯간지럽다. 그다지 세련돼 보이지도 않는다. 신당동을 예방한 나후보의 손등에 키스를 한 김종필 전국무총리의 행태는 아무리 좋게 봐도 낯뜨겁다.

아무려나 가을은 세상 사람들의 그런 언구럭 따위엔 아랑곳조차 않는다. 하여 쑥부쟁이며 구절초 등 갖가지 들국화가 온 산기슭이며 들녘을 수놓고 있다. 특히나 정읍시 산내면 옥정호반 옆 구절초공원의 꽃들은 남다르다. 무려 12ha에 이르는 구절초 바다다. 그 꽃들이 연보랏빛 구름밭같은 모습과 그윽한 향기로 아찔하게 한다. 세상의 잡스런 생각과 어지러운 욕심을 지우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서릿발 같은 기개를 품고 핀 구절초는 함부로 그 향훈을 팔지 않느니.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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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nyone

    오래 전, 한글판 ‘리더스다이제스트’에 ‘하루핀’을 여러가지로 구부려서 부리는 묘기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그 짧은 철사 한 가닥을 구부려서 별별 것들을 다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자전거 타는 사람’의 모습도 구부려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나 명작은 맨 나중에 나왔습니다. 전혀 구부리지 않고, ‘하루핀’ 그대로이 사진입니다. 제목이 ‘트럼펫’이었습니다.

    ‘서 있는 저 사람이 절정의 춤을 추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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