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난 일들이 더욱 새롭습니다.

                    <칼럼> 지난 일들이 더욱 새롭습니다.

                                           -이동남 교장의 정년을 기리며-

 

봄이면 솔베이지의 노래를 즐겨 듣곤 했습니다. 서주는 화음 반주도 없이 여린 멜로디로 시작이 됩니다. 그렇게 몇 마디가 지나면, 멜로디 없는 반주화음이 나옵니다. 똑 같은 화음이 한 박자씩 쉬면서 세 번 이어지고, 노래는 네 번째 화음부터 시작이 됩니다. 포코 안단테, 차츰 천천히,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지, 어떻게 그리웠었는지 노래를 합니다. 매양 들을 때 마다, 참으로 슬프고 아름다운 곡이라고 느꼈습니다. 친구의 정년 소식을 듣고 그 솔베이지의 노래가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왜 젊어서부터 ‘솔베이지의 노래’처럼, 어떤 것들의 ‘마지막 부분’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장항선 기차를 타고 군산에 오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군산여고 교사로 근무하던, 한창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봄철에 장항선을 타면 좋았습니다. 기차가 대천-보령 근처를 지나면 철로 주변 산모롱이는 온통 진달래꽃들로 붉었습니다. 차례로 승객들이 내리고, 장항 가까이 오면 자리는 드문드문 몇 사람만 남습니다. 종점에서는 모두 내려야 했습니다. 서울에서부터 장항까지 기차를 함께 타고, 또 몇몇은 장항에서 군산까지 배로 건너와 도선장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헤어질 때는 묘한 연대감이 생겼었습니다. 시작과 끝을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은 큰 인연이고 가슴속에 따뜻한 정겨움을 남기게 합니다.

 

이제 함께 여행을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차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두 역 사이를 두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모두 내려야 합니다. 몇 역 먼저 내리는 사람도, 빈 기차에 덜렁 남아 종점까지 가는 사람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년이란, 먼 여행의 끝자락 같기도 하고, 먼 산이 밝아오는 어느 새벽녘 꿈결 같기도 합니다. 차창에 스쳐가던 풍광이 생각나기도 하고,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공주에서 함께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먼 길을 함께 지나오며 고락을 나눈 같은 동료로서의 정이 새삼스럽습니다.

 

오랜만에 먼지가 쌓인 대학교 졸업앨범을 들춰서 봤습니다. 거기에 옛날이 다 있었습니다. 하긴 4년 동안 출석번호도 바뀌지 않고 내내 같은 반이었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어떤 친구는 출석부대로, ‘강영진, 김갑록…’하고, 이름을 줄줄 외기도 했었으니까요. 앨범은 흑백사진인데, 모두 늠름하고 잘 생겼습니다. 스냅사진은 다섯 명씩 짝을 지어 찍었습니다. 이동남군의 팀은 공산성 성곽위에서 찍었습니다. ‘김갑록, 차경호, 이동남, 유동준’이었습니다. 무슨 졸업사진을 산성공원까지 가서 찍었을까, ‘그 사진사 고생이 꽤 심했겠군.’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팀을 찾아 봤습니다. 김한신, 오시봉, 전영춘, 박봉구, 장택상. ‘그런데, 도대체 저기가 어디지? 저기가 영명고등학교 뒷산 아냐?’ ‘아니, 사진사가 거기까지 갔네. 등산도 아니고, 대충 찍지 왜 그랬을까’하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앨범에는 모교 은사님들 모습도 보였습니다. 산성공원 진남루 앞에서 찍은 학과단체사진은 물감이 번진 수채화 같은 칼라사진이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소원섭 교수님은 오래 전에 작고 하셨고, 강명경 교수님이 돌아 가신지도 벌써 꽤 되었습니다. 쌍수정 앞에서 신입생 환영체육대회였었던가, 소원섭 교수님께서, ‘꿈이여 다시 한 번’이라는 노래를 열창하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소 교수님 사모님께서 ‘모범약국’을 하셨는데, 대학교 다닐 때, 서병직이 자주 집을 봐 줬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기억에 의하면, ‘반찬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소 교수님은 전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실 때 가끔 뵈었고, 그 당시 아드님이 원광대 치대를 다녔었습니다.

 

강명경 교수님께서는 산을 좋아 하셨답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들 1년 선배인 강진수 교장(2011년 대전 둔산여고에서 정년)이 교수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강 선배님의 말씀에 의하면, 돌아가신 다음에 유품을 보니 ‘산행일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산을 가셨던 것은 빼고, 계룡산만을 세어도 1030번 가량 가셨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꼬박꼬박 다니셨을까. 존경을 넘어 경이로움 마저 느껴졌습니다. 강 교장을 몇 번 뵙고 은사님의 숨겨진 면모를 몇 차례 들었습니다. 저희가 뵐 때는 그렇게 엄격하게 보이셨던 은사님의 인간적인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1년 선배님들은 가끔 강 선배님을 시켜서 ‘휴강 요청’을 했던 모양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아들의 부탁을 잘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들을 알았더라면, 우리도 그래 볼 걸 그랬습니다. 그것 참 아쉬운 일입니다. 한 가지 일화를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강진수 선배님은 초임을 공주 농고로 받으셨답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부르시더랍니다. 말씀인 즉, ‘너도 이제 월급을 받으니, 한 달에 얼마 씩 밥값을 내라’는 것이었답니다. 그 때 댁이 산성공원 아래였습니다. 강 건너 농고까지 걸어 다니기가 힘들어서 아버님께 ‘자전거를 하나 사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저 아래 자전거포에 가서 내 얘기하고 한 대 달라고 해라. 그리고 돈은 몇 달 나누어서 갚아라.’고 하시더랍니다. 그 뒤 선배님이 결혼을 하고 형수님께서는 만삭이 가까웠는데, 선배님 말씀이 ‘정말 죽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아버님께서 부르셨답니다. ‘그 동안 네가 준 돈은 적금을 들었고, 내가 좀 돈을 보태서 대전에 아파트를 하나 샀다. 그리 이사를 가거라.’고 하시더랍니다. 대전에 처음 생긴 아파트(유나?)였답니다. 강 선배님 말씀이 ‘뛸 듯이 좋더라.’고 했습니다.

 

공주사범대학은 대한민국의 배꼽과 같은 위치에 있고, 그런 역할을 하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우리나라 사범교육의 요람으로서, 교육을 통하여 우리의 다음 세대에 자양을 공급해 주는 탯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우리 인류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문명과 문화를 계승하고자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에서 ‘교육은 산업이다.’ 운운하며, ‘교육을 통하여 이윤을 창출하도록 채찍질’하는 것은 한 마디로 ‘비극’입니다. 교육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무지에서 나온 소치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산업화와 군사문화에 찌든 천박한 사람들이 교육을 자기들 입맛대로 농락하는 것은 시대의 죄악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동남 교장의 정년을 축하 합니다. 그 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언제 전주에도 오십시오. 이곳 어디엔가 비껴가지 못할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찾아가 봅시다. 우리는 137 광년의 광막한 우주에서 희미하게나마 스스로 빛을 내는 별들이고, 우리는 그런 별들을 기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장택상/군산대학교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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