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채동선기념관’갔습니다

날씨가 매섭게 추웠습니다. 방송에서는 60여년만의 추위라고 야단이었습니다.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아 도로상태는 좋았습니다.  바람이 심했지만 차안은 따뜻했고, 햇빛에 눈이 부셨습니다. 전주에서 아침 10시가 못돼 출발했었는데 벌교읍사무소에 이르니 12시가 넘은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읍사무소 앞에 있는 식당에서, 벌교에서 유명한, ‘꼬막정식’을 먹었습니다. 1인당 1만 5천원이었는데, 반찬이 ‘부실’했습니다. 꼬막으로 전을 부치고, 회무침을 하는 등, 몇 가지 반찬을 올렸는데, 가격에 비하면 반찬의 종류와 맛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순천만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는데, 관광지에 가면 특산 음식이라고 섣부르게 주문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디나 맛이 공통인 짜장면이나 생선탕, 아니면 한우 불고기 또는 그냥 백반을 시킬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벌교읍사무소 건물에는 ‘채동선음악당’이 있었습니다.  ‘채동선박물관’이라는 전시실도 갖췄습니다.  채동선(1901 – 1953)은 벌교에서 부호인 채중현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8세 때부터 40리가량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에, 어릴 때는 머슴의 등에 업어서, 다녔다고 합니다. 그 뒤 15세에 경기고보에 들어갔고,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 베를린 슈테른쉔음악원을 마쳤습니다.

그가 독일에서 귀국할 때 가져고 온 바이올린은 세계적인 명기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계정식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독주회를 할 때 채동선의 바이올린을 빌려서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 바이올린을 미국에 사는 아들이 가지고 있었는데,  손자가 그 악기로 바이올린을 배워 연주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시관에는 ‘모조품’ 바이올린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진품은 연주여행중에 분실’되어 유족이 모조품을 기증했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전시되어 있는 악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지만, 짐작하건데, 1920년대에 동구권(첵코?)에서 제작되어 미국으로 수입됐던 ‘슈바이쳐’ 모델로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좌익이었고 월북했다고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낭설입니다. 채동선은 6.25전쟁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었고, 1953년 가난속에 53세로 피난지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채동선이 좌익이었다는 낭설은 그가 정지용의 시에 작곡한 ‘고향’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채동선이 독일에서 5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1929년이었고, 정지용이 시 ‘고향’을 발표한 것이 1932년이었습니다.  가곡 ‘고향’은 시가 발표된 1930년대 초반에 작곡된 것입니다. 채동선은 모두 12곡의 우리 가곡을 작곡했는데 그 가운데 9곡이 정지용의 시였습니다.

해방 후에 각 음악교과서에는 가곡 ‘고향’이 실렸습니다. 6.25전쟁 이후에 정지용의 시가 좌익이라는 누명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이 때 출판사에서 급히 박화목 선생에게 작사를 의뢰한 가사가 ‘망향’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그 ‘망향’을 배웠읍니다. 그러다가 채동선의 미망인인 이소란여사를 중심으로 몇몇 인사들이 정지용의 시에 작곡된 다른 곡들도 가사만 새롭게 바꾸자는 사업을 벌였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라도 보급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때 또 지어진 노랫말이 이은상의 ‘그리워’입니다. 채동선이 작곡한 ‘고향’이라는 가곡에 2개의 또 다른 노랫말이 생기게 된 까닭입니다.  노래는 세 가지 가사가 모두 훌륭합니다. 특히 박노경의 ‘망향’은 절창으로,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아쉬운 것은 아직 정지용 가사로 된 원곡 ‘고향’을 멋지게 노래한 남자 성악가가 없다는 점입니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녹음이 있지만, 선이 가늘고, 원곡의 맛이 제대로 나지를 않습니다. 테너 박인수 선생님은 이미 나이가 드셨고, 테너 김남두씨, 바리톤 고성현 씨 등에게 기대를 해보고 있습니다.

을하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