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에 대해 김황식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정부가 종합대책을 내놨다. 폭력학생에 대한 학교장의 재량권을 확대하고, 학교측의 ‘은폐행위’에 대해서는 ‘금품 수수’와 동일한 수준에서 처벌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정부의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이다. 재판은 어린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어린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가지라.’고 솔로몬 왕이 판결하자 친어머니인 여인이 울면서 양보했다는 내용이다. 솔로몬의 재판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와 두 여인은 오늘날 학교폭력 문제에 있어서 어떤 측들이라고 볼 수가 있을까. 학생들이 어린아이이고, 학부모와 정부가 두 여인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솔로몬의 재판의 구도는 그것이 아니다. ‘누가 어린아이를 더 잘 알고 사랑하느냐’, 즉 ‘누가 더 교육의 본질을 잘 이해하느냐.’라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학생들이지만, 그 것은 실질적으로 ‘학생들의 교육’을 걱정하는 셈이다. 교육은 개별적으로 성격과 수준의 차이가 있는 학생들 각각에게 바람직한 변화를 주는 것이다. 인류는 시대와 사회체제에 따라서 교육의 틀을 바뀌어 왔고, 인류가 잘못된 교육의 틀에 의하여 고통을 받았던 시기도 있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사회에서는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심신이 건강한 민주시민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그 목표가 곧 솔로몬의 재판에서의 어린아이라고 볼 수가 있다. 친어머니은 누구일까. 교육이 문제의 본질이라면, 학부모가 친어머니가 아니다. 오히려 교육을 아는 일선 학교의 선생님들을 친어머니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교육의 방향이 있다면 일선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지금 사회에서 논의 되고 있는 학교폭력 근절 대책에는 교육을 일선 선생님들에게 맡긴다는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공통의 합의점과 지향점은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천부의 인권은 어느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학생들을 위한 인권조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의 인권뿐 아니라, 교사들의 학생들에 대한 인권존중으로 이해되는 현실에서,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아가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에게 족쇄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인권조례를 학교에 국한시키지 말고, 가정, 아니 사회 전체로 확대해서 생각해 보자. ‘모든 사람에 대한 인권조례’라는 식으로 범위를 넓혀 보자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교육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양육, 사회에서의 복지에 까지 ‘인권조례’를 정해도 되겠는가. 그럴수가 있는 것인가. 넌센스다.
부모를 믿지 못하고 어떻게 자녀를 키울수가 있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을 존중하지 않고 어떻게 교육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학교와 선생님들을 못 믿는다면 옛날 봉건사회로 돌아가야 한다.중세 귀족들 처럼 독선생들을 집에 모셔놓고 각가 자식들에게 맞춤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사회에서의 교육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방법을 익혀야 된다. 그래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건전한 민주시민을 길러내야 한다.
교육은 정부와 학부모가 선생님들에게 최종적인 판단을 맡기고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정부와 사회가, 교육의 본질을 모르고, 교육을 두 조각으로 나누려해서는 안 된다. 교육에 대해서 누가 과연 친부모인지, 솔로몬의 재판을 곰곰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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