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 진동규 시인 고향이랍니다.

‘봄이 왜 이렇게 추워!’라고 하지만, 꽃샘추위가 없는 봄이 언제 있었던가. 진동규 시인 내외분과 함께 시인의 고향, 고창 상하로 가는 길은 곳곳에 흰 보푸라기와 같은 눈발이 날렸다.

흩날리는 눈발을 보니 박용래 시인의 싯귀절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픗 떠올랐다. 진 시인에게 그 얘기를 끄집어 냈다.

“박용래 시인이 고향을 찾았을 때, 무슨 닭털이 날린다고 했었는데…,  눈발이 꼭 닭털이 날리는 것 같네요.”

우리 일행은 흥덕 해리 심원을 지나, 버스노선 이름으로 ‘해안선’이라 부르는, 겨울이면 눈이 참 많이 내리는, 남쪽으로 쭉 내려 갔다. 신작로에서 고향 마을길로 접어들면서, 나도 그 길을 알지알지만진동규 시인께 슬쩍 물어 봤다. ‘여기지요?’ 질문의 타이밍이 절묘해서였까, ‘음’이라는, 신음에 가까운 대답이  들려왔다.

봉황이 내려앉는다는, 고창군 상하면 송곡리 ‘봉강(鳳降)’.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고향집. 수선화는 새순이 올라왔고, 동백꽃도 아직 피지피지고, 황매만 노랗게 피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준비해간 원두커피와 빠게뜨로 간식을 챙겨먹고, 연방죽 뚝방에 이팝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바삐 무장면 소재지로 향했다.

고향을 뒤로하고 넘어오는 고개에서 나는 또 짖궂게 시인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가, 그 진달래가 산을 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의 배경이네요?” 진 시인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내게는 정확히 들리지를 않았다.

무장면 소재지에는 고향에 눌러사는 진 시인의 친구들이 있었다. 찾아간 집 안주인은 손자 봐주러 아들집에 갔고, 친구는 혼자였다. 진 시인이 조촐한 술상에 친구들과 함께 둘러앉는 것을 보고, 나는 사모님과 함께 진 시인이 옛날에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는 ‘용현당’과 무장읍성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왔다.

무장 읍성

무장읍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남문인 ‘진무루’와 객사인 ‘송사지관(松沙之館)’, 그리고 동헌으로 쓰였던 ‘취백당(翠白堂)’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객사로 쓰였던 송사지관(松沙之館)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라는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무장(茂長)’이란 이름도 역시’무송(茂松)’과 ‘장사(長沙)’라는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송사지관

취백당기 현판

동헌으로 쓰였던 ‘취백당(翠白堂)’은 원래 ‘송사당(松沙堂)’이었다고 한다.  영조 때 ‘최집’이라는 현감이 부임하여, ‘송사당(松沙堂)’이라는 당호의 뜻이 깊지 못하다며 이름을 ‘취백당(翠白堂)’으로  바꿨다고 한다.  ‘취(翠)’는  ‘송(松)’에서, ‘백(白)’는 ‘사(沙)’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취백당기’가 남아있는데, 현감 최집이, 본인이 문장을 짓지 않고, 그 고을에 사는 ‘정일오’라는 유생에게 짓게하였다고 한다. 현감이 지을수도 있었겠지만,  그 고장 유생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보인다. 최집은 꽤 멋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취백당 뒤에는 낙낙장송이 있는데 가지가 멋대로 늘어져서 꽤 볼만 했다. 그소나무 뒷쪽 언덕이 연병장이었다고 한다.

취백당에서 바라본 객사 ‘송사지관’의 뒷모습

진 시인이 공부했다는 용현당에는 이제 막 수선화가 싹 터서 올라오고 있었다. 용현당에서는 진시인의 먼 친척되시는 분이 나와 계셔서, 집안 내력 등, 여러 말씀을 해주셨다. 오래 된 회갑연 사진도 보여주셨는데, 거기에, 진 시인의 부친되시는 분도 계셨다.

용현정에는 수선화 꽃봉오리가 맺혔다.

회갑 기념사진(1940년)

진 시인의 친구집으로 돌아와보니 시인은 친구들과 함께 그때까지 거나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돌아올 길이 바쁜데, 시인은 친구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어쩔 것인가, 한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진 시인이 고향 친구들과 담소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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