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물로 가득찬 통에 포도주를 한 숟가락 넣으면 오물이 된다. 포도주로 가득한 통에 오물을 한 숟가락 넣어도 오물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요는 오물이란 단 한 줌만으로 수백 배의 유익한 것들을 더럽힌다는 얘기다. 바로 엔트로피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이다.
살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선행도 하고 악행도 저지른다. 선행이라면 모를까 악행이라면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자행하는 게 더 질이 나쁘다고들 일컫는다.
그러나 범부들의 삶이 어디 그리 뜻대로 마음 먹은 대로 되던가. 될 수 있는 한 지탄받지 않도록 꾸리고 되돌아보려는 자세가 그래서 필요하다.
전술이나 전법상으로도 그렇다. 예를 들어보자. 적이 내 사정권 안에 있다는 말은 나도 적의 사정권 안에 있다는 뜻이다. 흔히 이럴 때 적을 내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큰 착각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내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가지만 생각한다.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해버리는 섣부름이다.
한 스승 밑에 자기 이름 석자밖에 모르는 제자가 있었다. 스승께서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알려주더라도 그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바보였다.
‘수구섭의신막범(守口攝意身莫犯) 여시행자득도세(如是行者得度世)’ 곧,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착한 마음을 항상 가져 몸으로 죄를 짓지 말지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은 능히 세상을 제도할 수 있다.’
제자는 겨우 이 14자를 3년이 지나도록 외우지 못했다. 오히려 어깨너머로 스승님의 말씀을 얻어들은 동네 꼬마 아이들은 모두 줄줄 외웠다. 그는 학교 담장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열등감으로 비분에 빠져들었다. 세상에 나같이 미련한 바보가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스승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짐승보다 못한 식충이에 불과하다. 스승님의 가르침은 내게는 천부당만부당한 과분한 것이다. 제자가 이처럼 시름에 잠겨 있는 것을 스승님께서 보았다.
“너는 왜 슬피 우느냐?”
“스승님, 저는 너무 어리석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걱정 말아라. 제자여. 자기가 어리석은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어리석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 아둔한 사람이 바로 주리반특(周利槃特)이다.
스승은 다른 제자에게 그의 지도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 제자는 자기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보였다. 그러자 스승은 직접 지도를 하겠다며, 빗자루를 주리반특에게 주었다. 스승은 “이 빗자루로 배움터 안팎을 깨끗이 쓸고 닦아라”고 일렀다.
그는 빗자루를 받아들고 수백평의 학교 배움터를 한 달, 두 달, 일 년 동안 정성껏 깨끗이 쓸고 또 쓸었다. 주리반특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스승님께서 내게 빗자루를 주신 것은 배움터를 쓸라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번뇌를 쓸라는 것이었구나 라고. 그는 그 뒤로 줄곧 마음의 티끌도 함께 쓸어냈다. 이리하여 주리반특은 마음이 맑아지면서 공부의 길을 알게 됐다. 스승은 즉시 주리반특이 공부가 이뤄진 것을 알고 찾아가 물었다.
“빗자루는 어떻게 했느냐.”
“제 마음의 먼지를 쓸어냈습니다.”
“착하고 착하도다. 너는 배움터를 쓸었으나, 실은 네 마음의 티끌을 쓸었느니라. 그것은 온 세상의 티끌을 쓸어낸 것이나 다름없느니라.”
이처럼 인간이 지혜 있는 사람이니 어리석은 사람이니 또는 둔하다느니 하는 것은 눈앞에 나타나는 구별에 불과하다. 뮨제는 어떻게 슬기를 갖추느냐이다.
실제로 잘 생각해보면 세상의 지혜니 분별이니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최근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사례로도 유추할 수 있다. 남보다 뛰어나고 분별력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실상은 기대 밖이다. 그 아집과 허세로 인해 도리어 미혹을 일으키고 잘못을 저질러 세상에 누를 끼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반면에 주리반특과 같다면 진정 어리석지는 않다. 스스로 어리석음을 경계하기 때문에 도리어 잘못을 범하지 않고 남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혜나 분별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승이나 세상의 가르침을 잘 새기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렇게 아둔함을 떨치려고 한다면 최소한 남의 조롱거리는 되지 않는다.
한 남자가 아프리카에서 겪은 일이다. 그는 난생 처음 보는 바나나를 대접받았다. 어떻게 먹는 지를 몰랐던 그는 껍질째 먹었다. 그러자 주인은 껍질을 벗기고 먹었다. 물론 어떻게 먹는 지 가르쳐주려 함이었다. 이것을 본 남자는 다시 바나나를 집어들고는 또 껍질째 통째로 씹어먹었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나는 껍질째 먹는 것이 더 맛있다”였다. 이 남자가 현명한가. 어리석음을 고치려 하지 않고 한술 더 떠 고집까지 부리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음은 인정하면 허물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고집할 때 더 미련퉁이가 된다.
한 가지 더. 한 시골뜨기가 부자 친구집에 초대받았다. 친구는 손을 씻으라고 식탁 한쪽에 물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영문을 모르는 이 시골뜨기는 물을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난처해진 친구는 자기도 물 한 그릇을 더 가져오라고 해서 억지로 마셨다. 물론 친구를 위한 속 깊은 배려였음은 당연한 이치. 모르는 절차나 격식이라면 물어보면 간단할 터. 어려울 것도 없고 수치가 되는 것도 아니다. 허나 알량한 자존심이나 허세 따위로 자신을 감추려하니 더 우스꽝스럽고 산통이 다 깨진다.
세상 사람 가운데 어찌 이런 아둔한 사람들만 있겠는가. 그 잘난 체면 때문에, 허위감 때문에, 거만함 때문에 자신의 참된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런 부류들이야말로 어리석다 못해 아둔하고 미련하고 가련하기까지 한 존재들이다. 자기는 남을 돌려먹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아둔함에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항공기내에서 기내식 시비 끝에 여승무원을 폭행한 포스코에너지 임원은 가관이다. 추태가 물의를 빚자 결국 사직서를 낸 그런 아둔패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겨우 기내식 라면 서비스를 문제 삼아 여성 승무원을 폭행하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 부류의 인물이 거대 기업의 중견 임원이라면 그 기업의 사원윤리 수준을 알만하다. 기내 추태만이 문제가 아니라 해당 기업의 이미지 추락과 기업체 임원에 대한 불신은 또 어쩌란 말인가.
얼마전 박근혜 대통령이 조각을 마무리했다. 무려 52일 만이다. 그 사이에 후보자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로 낙마한 이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인사 사고라는 말이 빈번히 나오는 배경이었다.
이번 조각의 마무리를 장식한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은 두고두고 논란거리다. 가까스로 꼬리표를 떼기는 했다지만 참으로 딱한 임명이다. 수많은 국민과 야당, 심지어는 여당에서조차 적절치 못한 인선이라는 반대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윤진숙씨를 해양수산 행정의 책임자로 임명을 강행했다. 그만큼 윤진숙 장관을 인정할만한 근거가 무엇인지 석연치 않다. 때문에 대통령의 이 맹목적인 믿음이 국민들을 걱정케 만든다. ‘모른다 진숙’ ‘까먹 진숙’이라는 웃지 못할 별칭으로 유명해진 그런 인사다. 그런 인사를 굳이 임명한데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만 신뢰하는 특별한 비장의 노하우라도 갖췄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장관이란 세부적인 업무까지 많이 알면 더욱 좋은 중요한 자리이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최소한 관장 업무를 체계적으로 추스릴 줄은 알아야 되는 것 아닌가. 윤장관의 경우 아둔함을 깨우치는 슬기란 도무지 기대하기 어려운 인선의 최저치였다.
그것이 한 개인의 진로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국의 해양수산이라는 방대하고 중대한 업무의 책임자에 관한 지모를 물어야겠기에 더욱 그렇다. <화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