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각비 42> 넋을 뺏긴들 얼이 빠진들 매 한가지

때 이르게 봄이 쳐들어왔다. 모두들 봄더위라고 했다. 허니 꽃들이 수선을 피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망울들을 방싯거렸다. 때는 이때다 싶었겠지. 허나 이것이 정상은 아니다. 날씨마저 미쳤다. 꽃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으랴. 절기가 흐트러지고 날이 더워지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게지. 모두가 인간의 탓이다. 지구를 덥게 만든 것이 누구던가. 하나뿐이라고 그렇게들 애지중지 하던 우리의 터전은 지쳐가고 있다.

사실 우리의 행동거지는 애지중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북극과 히말라야의 빙하가 급속도로 줄고 있다.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도 머지 않아 볼 수 없게 된단다. 파타고니아의 웁살라 빙하는 모두 녹아 호수로 변했다. 이러고도 인간이 지구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간직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넋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만도 한 몫 했다. 모두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이처럼 망가지고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다. 뒤늦게야 탄소가스 배출을 억제하려는 노력들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래저래 사람이 사는데 넋이 나가거나 얼이 빠지면 아무 것도 안 된다. 삽시간에 지나가는 봄을 더디고 느긋하게 누리기 위해서도, 자연의 순행을 위해서도 얼을 바짝 차릴 일이다. 그것이 쇠잔해진 지구의 기력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줄 수 있는 길이다.

그 옛날 넋을 빠뜨린 어떤 유자(儒者)의 얘기는 왜 얼을 차려야 하는지 교훈을 준다. 어느 날 맹자(孟子)가 유하혜를 만났다. 유하혜는 맹자 앞에서 심히 방자하게 굴었다. 되레 제 자랑만 늘어놓고 잘난 체 했다. 그러나 맹자는 유하혜를 보고 아무런 내색도 안했다. 오히려 겸손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런 다음 뒤에 제자가 맹자에게 따졌다. “선생님! 그런 버릇없는 놈을 혼내 주시지 않고 왜 가만 계셨습니까?” 이를테면 그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을 따끔하게 꾸짖지 않았느냐는 항의였다. 맹자는 태연히 한마디로 답했다. “그이는 그이고 나는 나다.(爾爲爾 我爲我)”

다시 말해 격이 다르고 클래스가 다르다는 얘기다. 참새가 지저귄다고 덩달아 백로가 울지 않는 법이다. 중심이 있으면 덩달아 휩쓸리지 않는 것이 이치다. 그런 것을 공연히 한마디 하면 외려 한 통속에 빠지고 만다. 이 간단한 것을 맹문이 하수들은 모른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세상 만물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 본성을 잘 유지한다면 흔들림이 없다. 민들레는 민들레꽃을 피우고 엉겅퀴는 엉겅퀴꽃을 피우게 마련이다. 만일 유하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맹자도 같이 맞서 자기 자랑을 했다면 그것은 꼴불견이다. 그랬다면 어찌 맹자가 선생이겠는가. 본시 덜 여문 열매가 더 떫지 않던가. 상대가 건방떤다고 맞서서 휘어잡으려면 천방지축이 되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 그 결과 서로 간에 천둥벌거숭이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때문에 여기서 얼을 차리는 쪽이 한 수 위가 된다.

맹자는 유하혜의 오만무례를 왜 그대로 뒀을까. 혹이나 망신당하고 봉변을 쓸까 봐서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인숭무레기를 나무라기 전에 나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를 돌이켜보았기 때문이다. 하여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평정심을 지켰다. 결코 사람의 등급을 나누거나 편을 가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맹자는 사람들의 영원한 스승이 됐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너니 나니 할 것 없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드잡이질이요, 서로 헐뜯기에 눈이 뒤집혀 있다. 그것을 경쟁이라고 착각들을 한다. 이게 바로 아수라장이다. 자기 격도 모르고 자기 수준도 모르는 아둔패기들이 서로 잘났다고 으르렁댄다. 얼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그런 혼돈 속에서 허우적댈 리 만무하다.

게다가 한 술 더 뜨는 경우도 있다. 우리사회에 널리 퍼진 허위의식과 지적 허영심이다. 한때 큰 파장이 일었던 표절문제도 그중 하나다. 모두가 얼빠진 짓거리들이다. 넋이 나가도 한참 나갔다. 우선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병이다. 자신의 넋을 속이거나 아예 아둔패기로 만드는 미련한 짓이다. 노자(老子)에 이런 말이 있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면 윗줄이요,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은 병이다.(知不知上 不知知病)” 이 대목에서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은 무엇을 숨기고 위선을 떠는 것이 아니다. 알고도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태여 뽐내지 않아도 될 것을 일부러 자랑 삼아 자세하다 오히려 낭패를 보는 수가 많다.

제대로 알고 난 후에도 마음속에 가만히 품고 있으면 훨씬 돋보일 수 있다. 왜 그런가. 사람의 앎은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한계를 깨닫는 사람일수록 입을 가벼이 놀리지 않는다. 때문에 노자는 주문한다. 섣불리 말하지 말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더구나 지어내거나 넘겨짚고 추측해서 말해서는 더욱 안 된다고 말이다. 하물며 모르면서 아는 척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아는 척 한다는 것은 반쯤 알거나 얼치기로 아는 것을 온전히 아는 것으로 분칠하는 것이다. 완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척 한다면 큰 잘못이자 남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게 된다. 문대성씨의 표절은 참 말문이 막힌다. 그래 놓고도 아무런 반성하는 모습을 안 보여준다.

사람을 제대로 보기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좋고 나쁨, 정직과 거짓,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분별하기란 더더욱 난감하다. 왜 어려운가. 그 까닭은 보이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내게 있다. 결국 흐리지 않은 눈을 갖는 게 중요하다. 사기(史記)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큰 비로 부잣집 흙담이 무너져버렸다. 그 집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빨리 고치지 않으면 도둑이 듭니다.” 이웃집 주인도 거들었다. “빨리 보수하지 않으면 도둑이 들 거요.”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도둑이 들어와 재물을 훔쳐갔다. 아버지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들 녀석은 꽤 눈이 밝단 말이야. 어쨌든 의심스런 놈은 이웃집 주인이야. 그 놈이 훔쳐간 게 틀림없어.”

과연 아버지의 말은 타당한가. 아들이나 이웃집 주인이나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도 아들의 말은 현명한 판단으로 보이고 이웃 주인에게는 수상한 혐의를 씌운다. 누가 이 아버지의 생각을 옳다고 믿어줄까. 허나 현실은 이 아버지처럼 모두가 자기가 보려는 것만 본다.

한비자 세난(說難)편의 이야기는 더 재미있다. 이른바 ‘애증의 변덕’이다. 춘추시대 위(衛)나라 왕(靈公)이 미자하(彌子瑕)라는 미소년을 총애했다. 어느 날 궁중에 머물고 있는 미자하에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 미자하는 왕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왕의 수레를 몰고 집으로 갔다. 무단으로 왕의 수레를 탄 자는 발뒤꿈치를 베는 형벌을 받도록 돼 있었다. 미자하는 왕의 총애를 미끼로 금령을 어겼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처벌은커녕 미자하를 어질다고 칭찬했다. “효자로구나! 얼마나 갸륵한 효심이냐? 어머니 문병을 위해 발뒤꿈치를 잘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또 어느 날 미자하가 왕을 따라 과수원을 노닐 때였다. 복숭아 한 개를 따 깨물어보니 맛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물어뜯은 복숭아를 왕에게 올렸다. 왕은 다시 그를 칭찬했다. “과연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내게 권하다니!” 그래저래 세월이 흘렀다. 미자하의 고운 용모가 쇠퇴함에 따라 총애가 줄었을 때 사소한 일로 죄를 짓게 됐다. 왕은 옛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뒤집어씌웠다. “그래 그놈은 거짓으로 내 수레를 훔쳐 탔던 거야. 또 제가 베어 먹던 더러운 복숭아를 내게 먹였어.”

미자하의 행동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랬건만 과거에는 어질다 칭찬 받았다가 뒤에는 죄를 얻고 말았다. 애증의 변화에서 빚어진 일이다. 우리도 이 위나라 왕의 판단을 따라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람을 판단할 때 선입견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곰보가 보조개로 보이고 보조개가 곰보로 보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 넋을 잃지 말아야 한다.

중국 사상가 이종오는 후흑학의 대가다. 그는 인간의 근본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아닌 ‘후흑(厚黑)’에 있다고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후흑학을 탐독한 뒤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는 바로 그 후흑이다. 후흑이란 면후심흑(面厚心黑)에서 온 말이다. 곧 “낯두껍고 속마음이 시커멓다”는 뜻 아닌가. 이종오는 항우가 천하를 얻지 못한 것도 후흑이 부족해서라고 플이했다. 유방을 제거할 수 있었을 때 아량을 베풀어 회한이 되고, 패배의 수치를 견디지 못해 자결한 건 바로 그 때문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재벌, 정치인, 고위 관료, 각계 전문가들의 비리와 일탈이 도가 지나치다. 과연 이 수준밖에 안 되는지 자괴감이 크다. 이종오가 살아 있다면, ‘모두 공리를 도외시하고 사리만 채우려고 후흑을 비루하게 오용했다’고 질타할 게 뻔하다.

부정한 방법으로 뽑히고도 단 한 마디 사죄도 않는 국민의 대표를 두고 모두들 좋다 한다. 얼이 빠진 사람들 아니면 그럴 수 없다. 또다시 선거의 미친 바람이 불어 온다. 뻔뻔하고 음흉해지지 않으면 이기기 힘든게 선거 아니던가.

이런 때 마음을 추스르기에는 눈물나는 한 편의 시가 제격이다.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꽃 이른 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속에서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봄’이다. 천형이라 불리는 문둥병을 ‘어처구니 없는 벌’이라며 한탄했던 그였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고 울부짖었던 그였다. 결코 찬란하지만은 않은 봄, 얼을 똑바로 차리게 만드는 시가 아닐 수 없다.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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